기축통화, 외환보유고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

 


국제경제의 세계는 얼핏 보면 거대한 질서 속에 잘 짜인 톱니바퀴처럼 보인다. 각국의 통화가 서로 교환되고, 무역이 이루어지며, 자본이 국경을 넘는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는 위계가 존재한다. 바로 기축통화라는 이름의 특권이다. 그리고 그 특권은 외환보유고라는 이름 아래 다른 나라의 자산 일부를 고스란히 흡수한다.


'기축통화'라는 말이 가진 무게

기축통화란 단순히 국제 거래에서 많이 쓰이는 화폐가 아니다. 이는 일종의 신뢰의 상징이자 국제 금융 질서의 중심 통화다. 현재 이 지위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달러다. 물론 유로화, 엔화, 위안화도 일정 부분 기축통화 기능을 하지만, 달러의 위상은 압도적이다. 전 세계 외환보유액의 약 60% 이상이 달러로 구성돼 있다.

기축통화의 위상은 미국에 특별한 권한을 부여한다. 자국 화폐를 찍어내는 것만으로 세계 각지에서 물자를 들여올 수 있는 능력. 다른 나라가 수출을 하면서 받아간 달러는 곧 다시 미국 채권을 사는 데 쓰인다. 자본이 순환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달러를 찍어낸 미국이 글로벌 자본의 순환 구조의 중심에 선다.


왜 외환보유고는 기축통화로만 구성되는가

외환보유고란 쉽게 말해, 국가가 위기 상황에 대비해 쌓아두는 ‘달러 비상금’이다. 한국처럼 무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대외 지불 능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외환보유고를 꾸준히 축적한다. 여기서 핵심은 대부분의 외환보유고가 ‘기축통화’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는 달러 중심의 국제 거래 관행이 고착화된 결과다.

문제는 이 구조가 매우 비효율적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달러를 벌기 위해 수출을 해야 하고, 벌어들인 달러는 다시 미국 국채에 투자된다. 여기서 발생하는 이자 수익은 매우 낮다. 수출로 벌어들인 자본을 낮은 수익의 자산에 묶어두는 셈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달러를 찍어낸 미국이 앉아 있다. 종이 한 장의 잉크값으로 실물 경제의 가치를 가져간다.


기축통화의 그늘, 현대판 조공 시스템인가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긴다. 이 구조는 과연 공정한가? 외환보유고라는 이름으로 기축통화국의 화폐를 보유하게 만드는 국제 질서 자체가 일종의 수탈 구조는 아닌가?

사실상 미국은 달러의 발행국이자 채권국이다. 그들은 무역수지 적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자를 통해 달러를 세계에 공급하고, 이로 인해 기축통화의 위상을 공고히 한다. 반면, 적자를 우려하는 수출 중심 국가들은 끊임없이 달러를 벌어들여야 한다. 이런 구조는 외견상 ‘자유무역’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기축통화국이 시스템의 중심에서 자산을 빨아들이는 형태다.

이를 경제학자들은 ‘트리핀 딜레마’라고 부른다. 기축통화국은 세계 경제에 통화를 공급해야 하지만, 동시에 자국의 신뢰도도 유지해야 한다. 균형은 언제나 위태롭고, 그 균형을 맞추는 비용은 기축통화국 외 국가들이 부담한다.


탈(脫)기축통화 시도와 현실의 벽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브릭스(BRICS) 국가들이 주도하는 ‘기축통화 다변화’ 노력은 이 구조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다. 하지만 국제 무역에서의 달러 의존도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쉽지 않다. 신뢰와 유동성, 정치적 안정성이라는 3대 조건에서 미국 달러는 여전히 넘사벽의 위치에 있다.

게다가 새로운 기축통화를 만든다는 것은 단순한 통화의 문제를 넘어 국제 질서의 재편을 의미한다. 이는 경제뿐 아니라 외교, 군사, 문화까지 모든 영역이 얽혀 있는 문제다. 실현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구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실적으로 외환보유고를 기축통화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국가 신용도, 무역 결제의 편의성, 금융시장 안정성 등 모든 요소가 달러 중심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구조의 비효율성과 불균형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단순한 국제경제의 규칙이 아니라, 우리가 자산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직결되는 문제다.

그래서 국가적 차원에서 필요한 것은 외환보유고의 질적 개선이다. 단순히 양을 늘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익성과 안정성을 모두 고려한 전략적 운용이 요구된다. 아울러, 달러 일변도의 구조를 완화하기 위한 국제 공조와 대안 마련도 장기적으로는 병행돼야 한다.